유아인 (@)

Posted Friday 21st December 2012 from Twitbird Pro


이제 48프로의 유권자는 51프로의 유권자의 결정을 인정해야한다. 존중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한다. 이민가겠다고 떼쓰지 말고 나라 망했다고 악담하지 말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품어야한다.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적어도 멘토나 리더라고 불리는 자들이 먼저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진보 인사의 나찌드립이나 보수 파티타임의 메롱질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국민의 환멸을 재차 초래할 뿐이다. 대통령 후보는 선택할 수 있어도 대통령을 선택적으로 가질 수는 없다.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 18대 대선 당선자가 되었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열 올리며 총알 장전하기 전에 우리가 어째서 총을 들고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전쟁터에서는 이기는게 목적이지만 전쟁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적 없다.

분개하든 환영하든 진영논리나 윤리적 선악 구조의 이분법이 아니라 국민 각자의 역사의식과 도적적 잣대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로 오늘을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차기정부의 실정을 염려하되 실정을 염원하는 코메디는 없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판타지일지언정 차차기에도 정권교체가 필요없을 만큼 제대로 일해주기를 바라는게 우선 아닌가. 그것이 국가를 위함이다. 과거를 각성하고 반성하며 앞날로 가야한다. 그것이 진보다. 국민은 감시와 말하기를 멈추지 말고 정치와 행동을 두려워 말고 영웅이 아닌 일꾼을 제대로 부려먹어야 한다.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50프로에 육박한 열망은 현재에 대한 불만과 변화에 대한 피상적인 염원이 투영한 정권교체를 향했던 것이지 문 전 후보 그 자체가 50프로의 지지를 받아낸 절대 가치는 아니었다. 문후보에게 충분한 감사와 위로를 보내고 진보는 이제 더욱 진보해야 한다.

야권은 구태에 매몰된 진보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못난놈이 거울 보기 두려워하는 거다. 멘탈도 얼굴도 과감하게 성형해야 한다. 종북이나 빨갱이 같은 오역된 수사와 결별하고, 악과 싸워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종교적 판타지 종영하고, 단어 그 자체로 보수 보다 상위 개념인 '진보'의 존엄성을 단단히 해야 한다. 불완전을 숙명으로 끌어안은 인간사회의 발전과 긍적적 변화를 지향하는 존엄한 가치로 국민을 설득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장기적으로 그것이 국민의 삶과 생계에 어떤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지 증명해야한다.

고이면 썩을 수 밖에 없다. 여에서 썩든 야에서 썩든 고인건 썩는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감시하며 권력의 집중을 막고 국가 현안에 힘쓰고 정책이 바르게 실현되도록 거기에 집중하길 바란다. 우선은 차기 대통령의 대탕평 인사가 어떻게 되는지 인수위회의 인사 부터 감시하고 지켜보자. 민주주의가 그런것 아닌가.

국민대통합의 약속과 마주하게 될 박근혜 당선자에게 그 약속 지키라면서 뒤로는 무조건적인 반대로 뻐팅기는 못난짓 하고싶지 않다. 선거때 교차로 마다 나붙었던 현수막의 약속들만 지켜도 더 나은 세상 될 수 있다. 100프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그녀가 몇프로나 해낼지 지켜보자. 약속은 꼭 지킨다니 그 약속의 책임을 믿음이란 무기로 그녀에게 강요할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응원도 할 생각이다. 대통령이 약속과 믿음을 져버린다면 국민과 역사의 심판대가 다시 그녀를 부를것이다. 염세는 최악이다. 낭만이든 이상이든 그만 좀 현실 핑계 하고, 제발 좀 '진보'해서 희망을 품어 보자.

마지막으로 절패감에 쩔은 백원담의 우리 세대를 향한 비열한 조소에 뻑큐를 날린다! 우리의 젊음은 당신의 염원대로 쉽게 착취당하지 않을꺼다.




진보 인사의 나찌드립
 
12월 19일

아침에 한술 뜨다가 비로소 울었다. 가끔씩 궁금한데 나찌 치하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신치하의 지식인들은?절망은 독재자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웃에게서 온다.한반도, 이 폐허를 바라보고 서 있다.


보수 파티타임의 메롱질

 
22시

1. '이념형 보수파', 환호작약, 득의만면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은 물론 민주진보파 사람들을 조롱, 야유, 겁박할 것입니다. 놔 두십시요. 지금은 그들의 '파티타임'이니까요.





절패감에 쩔은 백원담의 우리 세대를 향한 비열한 조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8&aid=0002968806

한편 유아인은 글 말미에 "마지막으로 패배감에 빠진 백원담의 우리 세대를 향한 비열한 조소에 XX를 날린다! 우리의 젊음은 당신의 염원대로 쉽게 착취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는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가 대선 직후 트위터에 남긴 "내가 당신들의 선택을 존중할 수 밖에 없음을 저주합니다! 자기 권리조차 수호할 수 없는 젊은 그대 그냥 그렇게 착취당하시라!"라는 글에 대한 반박으로 보인다.

21일 오후 백원담 교수의 해당 글은 삭제된 상태다.


18시간전 | 머니투데이 | 미디어다음

... 없음을 저주합니다! 자기 권리조차 수호할 수 없는 젊은 그대 그냥 그렇게 착취당하시라!"라는 글에 대한 반박으로 보인다.

21일 오후 백원담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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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image2006/logo.gif

한명숙과 조기숙, 그 선택적 기억상실증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


 
▲ 제주해군기지 찾은 한명숙 대표 ⓒ연합뉴스

참여정부 시절엔 강경진압이 없었다고?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창당 정당개혁단장,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총선기획단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노무현시민학교장인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가 오늘 아침 트위터에서 많은 트위터리안들을 발칵 뒤집어 놓는 발언을 했다.

“100%유권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참여정부는 부안,평택,천성산에서 계획을 철회하거나 반대자와 대화했습니다. 지금 참여정부라면 강정공사를 일단 중지하고 대화로 대안을 찾을겁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참여정부 시절의 시위진압의 문제에 대해 지적을 하였다. 특히 평택 대추리 투쟁의 폭력진압을에 대한 증언이 빗발쳤다. 그러자 그녀는 당시 자신이 외국에 있어 상황을 잘 모른다며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그 물음 이후 군경의 진압이 먼저 있었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경찰과 군대가 폭력적인 성향이 있어 시위진압이 격화되는 면이 있으나 그것을 당시 한명숙 총리가 그걸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다.

 

 
▲ 문제가 된 조기숙 교수의 트윗

이에 많은 트위터리안들이 분개를 터트렸다. 조금 온건한 것만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은 반응들이 있었다.

@C6H8O7_ 조기숙이 "평화로운" 강정 운운하며, 대추리에 있던 사람들을 폭도로 몰아가고 있어.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이라 하는 것과 뭐가 다르지? 조기숙 인지부조화류 갑이네.

@leontrozki 조기숙의 말처럼 방폐장을 반대하는 부안주민과 대화하기 위해 수천명의 경찰을 부안에 깔았습니다. 당시 부안의 어떤 분 말씀으론 "한국 경찰을 다 모아놓은 줄 알았다. 당시 행자부(?) 장관은 이장출신으로 지방자치의 상징적 인물였던 김두관 ㅠㅠ.

야권연대만 하면 강정마을 문제가 해결되나?

한편 어제 상황을 보면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까지 제주도로 내려왔지만 한명숙 대표와 강정마을 주민간의 만남은 싸늘했다는 게 현장의 후문이다. 강정마을의 많은 주민들은 한명숙 대표가 총리시절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한 발언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장에 나타난 한명숙 대표는, 야권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5분여간 연설하다가 주민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제발 내일까지만 있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장하였다고 한다.

한명숙 대표는 당장 폭파를 막기 위해 시위하는 사람들 앞에 와서, 야권연대를 통해 정권교체가 되면 문제가 해결될 거란 얘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제1야당의 대표가 그 현장에서 당장의 폭파를 막는 일엔 동참할 수 없는가? 모든 일은 정권이 교체된 다음에만 정상화될 수 있나? 하지만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추진된 것이 제주 해군기지라면, 우리는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설령 정권교체하면 이 사업을 중지시키겠단 마음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5분이란 시간은 자신의 말바꾸기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엔 심하게 부족했다.

보도에 따르면 야권연대 합의문에 제주해군기지 문제에 관한 합의가 포함될 것이라 하는데, 민주통합당 입장에선 많은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고은태의 트윗을 인용한다면,  (@GoEuntae) “각 정당은 이쯤에서 강정에 대한 자기 당의 공식입장을 밝혀 달라. 흔들림없이 추진할건지, 더 나은 방법으로 착한 기지를 만들겠다는 건지. 설계변경해서 제대로 만들겠다는 건지. 다른데다 만들겠다는 건지. 안 만들겠다는 건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 출신인사들은 현재 샌드위치 상태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당신들이 추진했던 한미FTA와 제주해군기지에 찬성하고 이를 함께 마무리하자!”고 요구하고 진보세력은 “지금의 반대에 진정성이 있다면 과거를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요구의 핵심이 굳이 그들을 무릎 꿇려 욕보이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고 오늘의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미래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한미FTA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고백하고 맹렬한 활동을 하는 정동영이나 참여정부의 과에 대해 주로 계승하겠다고 말하는 유시민, 천호선 등 통합진보당에 흘러 들어간 친노세력은 그러한 최소한의 성찰을 보여준 소중한 사례다. 그런 이들이 친노세력의 일부가 아니라 대다수가 될 때, ‘친노세력의 부활’은 ‘도로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한국 사회 개혁을 위한 희망의 증표가 될 수 있다. 친노세력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미화하지 말고 조중동과 진보진영의 물음에 대해 성실히 대답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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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趙秉甲, 1844년 ~ 1911년)
조병갑의 아버지는 조두순(趙斗淳, 1796년 ~ 1870년)

 부인은 전주이씨 이병양(李秉兩), 판서 이병문(李秉文)의 딸
후처 청송심씨. 부사 심영규(沈永奎)의 딸

 큰아들 조찬희(趙瓚熙, 1880 ~?) 진사 역임(처-연안이씨, 국장 이도(李度)의 딸 )
두째아들 조강희-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는등 골수친일파
조강희 아들은 조중완(趙重完)
조기숙- 조중완의 딸로서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이화여대 출신

 고종 30년 전라북도 고부군수였으며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유발시켰다.
본 관 양주(楊州).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사촌간이다. 1892년(고종 29) 4월 전라북도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었고 이듬해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1000냥)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안 거둬 주었다는 이유로 전승록(전봉준의 아버지)에게 곤장형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등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부지하여 전주로 달아나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밝혀져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해배되어 대한제국의 판사가 되었고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조강희(趙岡熙, 1889년 ~ ?)
고부군수 조병갑의 둘때 아들
조강희의 아들은 조중완이고 조중완의 딸은 조기숙
일제 강점기때 경성일보(京城日報)와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일했으며, 친일신문 동광신문(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통감부 기관지


조기숙(1959년 5월14일생)
증조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동학운동을 유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
조부는 조병갑의 두째아들이며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골수 친일파 조강희
아버지는 조중완

남편은 양형진(梁亨鎭, 1957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노무현시민학교장 (現 )
촛불집회에 관한 논문다수. 책 집필중. Professor, Ewha 국제대학원

2006   ~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국제학전공 부교수 
2005   ~   2006. 02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2004   ~      이화여대학교 국제정보센터소장 겸 국제대학원 교학부장 
2003   ~      노무현대통령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 
1990   ~      이화여자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조병갑 - 동학 농민 운동의 희생양

한 때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 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동학혁명에서 본질은 농민군이 조정의 학정에 대항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우리의 근대사와 정신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가 하는 것입니다. 동학혁명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혁명의 의미를 정당화할 학정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억울한 일이 될지 몰라도 누가 학정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비본질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기숙 교수가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8818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7679





“이런 뉴스 볼 때 기분은?”



[김창룡의 미디어창]국민을 모독하는 최근 두 사건

권력주변을 서성거리거나 권력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어법이나 행동은 종종 일반 시민들의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착각하거나 자기편의적인 해석과 언행으로 자신을 망치고 국민을 모독한다. ‘정치인은 언어를 강간한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친인척, 측근들의 부패,비리 드라마가 검찰의 중계방송으로 연일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다른 국가주요 정책이나 사건은 대부분 무시되거나 잊혀진 가운데 봉하마을이 2주 넘게 국가주요 아젠다 첫머리에 올라있다. 또 다시 전직 대통령의 부패 비리를 접한 국민의 심란하고 낭패스런 심사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그 장본인이다. 그는 2009년 4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의 ‘박연차 게이트’ 연루 사건을 ‘생계형 범죄’라며 노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조 교수가 한 라디오 방송사에 출연해서 한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조카사위 연철호 씨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각각 100만 달러와 50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난 데 대해) 언론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도를 하는데, ‘생계형 범죄’에 연루된 사람을, 권력을 동원한 ‘조직적 범죄’를 진두지휘한 사람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엄연히 가족이라 하더라도 독립된 인격체이며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가족의 일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법적으로 책임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정상문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된 데 대해서는)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참모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일을 했겠느냐. 나도 정말 안타까운 마음”(동아일보 4월 24일자 인용,편집).

조 전 수석이 이런 보도가 나간 뒤 ‘특별히 정정요청을 하거나 오해였다’는 주장이 나오지않은 것으로 봐서 정확한 인용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하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마당에 이 정도 옹호도 할 수 없느냐는 항변은 ‘자기네끼리’ 모여 있을 때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 의식과 말이 ‘바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방송사에 출연하여 공공연하게 주장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조 전수석은 자주 ‘상식에 어긋나는 일’ ‘몰상식한 일’이라는 식으로 상식을 거론하는데 ‘상식’마저 강간하는 것이 아닌가.

우선 대통령이 무슨 앵벌이도 아니고 대통령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는 사건에 대해 ‘생계형 범죄’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도대체 ‘생계형 범죄’의 정의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는지 길거리 시민들의 상식을 물어보라. 재임기간 공직자중 최고액의 봉급과 대우를 받고 퇴임 후에는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규정한 법에 따라 국민세금으로 봉급과 별도로 비서와 경호 등이 딸린 호사스런 예우를 받고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참모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일을 했겠느냐”는 부분도 시민의 울화통을 뒤집어놓는다. 이런 말은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놓을 수는 있지만 공개적으로 방송에서 떠들어댄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또한 노 전대통령에 대해 ‘법적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근거는 무엇인가. 주변 정황상 법적 책임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역시 아직은 모른다. 검찰의 수사중인 상황에서 ‘법적 책임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억지다. 법적 판단은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국민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데 억장이 무너진다. 더 기분나쁜 사건도 있었다.



친노 조기숙 "'생계형 범죄'를 전두환과 비교하다니"

"盧가 얼마나 청렴하고 재산 없으면 참모가 그런 일을..."

2009-04-23 10:27:02

참여정부때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대 교수가 23일 노무현 전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등의 수뢰 의혹을 "생계형 범죄"로 규정하며 노 전대통령을 적극 감싸고 나섰다. 정말 벼랑끝에 몰린 서민들이 과연 이 주장에 얼마나 공감할지 의문이다.

조기숙 "盧가 얼마나 청렴하면 참모가 그런 일을..."

조 기숙 교수는 이날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노 전대통령 일가 및 측근의 비리 연루 의혹과 관련, "이런 것을 갖고 역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하고 같은 선상에서 놓고 언론에서 보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생계형 범죄'에 연루된 사람을 어떠한 조직적 범죄를 진두지휘한 사람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들 의혹을 '생계형 범죄'로 규정했다.

그는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의 국가공금 횡령 비리에 대해서도 "기존 비서관들의 비리와는 좀 구분이 되어야 할 것이 노 대통령이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옆에서 참모가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일을 했을까 싶어서 나도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노 전대통령을 적극 감쌌다.

그는 더 나아가 노 전대통령 일가의 비리 연루 의혹에 대해서도 "엄연히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독립된 인격체"라며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책임을 느끼시는 것은 나는 적극 동의하지만 그 가족의 일을 가지고 노 전 대통령이 법적으로 책임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그 불법 자금이나 이런 뇌물에 관련된 건 없는 거 아니겠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이들이 노 전대통령 일가가 아니었어도 과연 주위에서 돈을 주었을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조기숙 전 홍보수석이 노무현 전대통령 일가 비리 연루 의혹을 "생계형 범죄"로 규정하며 적극 감싸고 나섰다. 정말 벼랑끝에 몰린 서민들이 과연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합뉴스 ◀ 조기숙 전 홍보수석이 노무현 전대통령 일가 비리 연루 의혹을 "생계형 범죄"로 규정하며 적극 감싸고 나섰다. 정말 벼랑끝에 몰린 서민들이 과연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합뉴스

"盧, 물증없이 소환하면 국민들 엄청나게 반발할 것"

그는 또한 국내외의 사례를 열거하며 검찰이 노 전대통령을 수사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어떤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 과거를 털고 가기 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이것은 엄연히 권력을 동원한 조직적 범죄였기 때문에 수사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예를 들어서 독일의 경우 최장수 수상을 했단 콜 수상이 불법 선거 자금에 연루되었지만 검찰은 기소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식 벌금을 내는 것으로 그냥 합의를 봤다. 그만큼 이건 정치적 사건이지 검찰이 법의 잣대를 휘두를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선진 민주 국가에서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이유는 전직 대통령은 엄연히 국민들의 지지로 당선되었고 또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있는데 자칫 이것이 정치 보복으로 비쳐지게 되면 원한의 정치가 악순환이 되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검찰의 수사는 뚜렷한 혐의도 없이 먼지가 날 때까지 털겠다, 완전히 먼지털이식 수사"라고 검찰을 맹비난했다.

그는 또 "엄연한 불법이 드러난 이란 콘트라 게이트 사건같은 데서도 레이건 대통령이 전혀 단죄를 받지 않았다"며 "그런데 이거는 그 무슨 권력을 이용한 범죄도 아니고 조직적 범죄도 아닌데 마치 큰 범죄인 양 이렇게 검찰에서 이용을 하는 것은 거의 정치가 실종되고 검찰이 정치를 능멸하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든다"며 거듭 검찰을 비난했다.

그는 이어 "김현철 전 김영삼 대통령 아들도 권력형 비리로 구속이 되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을 소환해서 조사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다. 또 외환위기를 가져온 주요인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지만 예우 차원에서 서면조사만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물증없이 소환을 한다면 이것은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영섭 기자




인륜을 저버린 정치검찰의 무한도전

(블로그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 조기숙 / 2009-04-23)

2주 전 주말 한국에 사는 독일 교수 2명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의 진실을 궁금해하더군요. 저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이란 사람을 믿지만, 당신들이 나처럼 생각하기를 기대하지는 않겠다. 현재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을 것은 못 된다. 사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한 번 기다려보자.”
한국을 전공한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국이 제도화된 민주국가(established democracy)가 되려면 멀었다. 아직도 개발도상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진국의 특징은 정권이 바뀌어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대 최장집권을 했던 콜 수상도 심각한 부정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수상이 의도적으로 과거를 캐지는 않았고 한두 해 후에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던 슈뢰더 수상도 적지 않은 비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정치가 깨끗하다는 독일에서도 정치인, NGO 스캔들이 종종 있다) 차기 수상이 캐지 않았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철저히 파헤쳐서 전임자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고 한다. 정치적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서 전 정권의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생기면 그건 선진민주국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저는 솔직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진보 진영 모두가 이 사건에 에 대해 숨죽이고 있는 이유는 어쨌든 부도덕한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고, 한마디 했다가 검찰의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 있다고 생각해 몸조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 교수들은 저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수사를 받는 것이 불편했지만 필요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정권을 맡은 사람들은 알아서 깨끗하게 조심할 터이니 우리의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독일과 미국의 경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정치보복 없어야 선진 민주국가>
엄청난 액수의 불법선거자금을 수수한 비리에 콜 수상이 연루되었지만 독일의 본 지방검찰은 소를 취하하는 대신 약간의 벌금만 납부하는 것으로 합의함으로써 콜 전 수상이 전과자가 되는 것을 면해준 바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조직적 선거개입과 은폐가 터져 나와 결국 사임에 이르렀지만 포드 후임 대통령은 취임 다음날 그를 사면했습니다. 그로 인해 포드대통령의 인기는 폭락했음에도 자신은 할 일을 했다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임기 후, 이란의 인질을 구하기 위해 무기를 밀매하고 그 돈으로 중남미 반군을 지원한 혐의로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져 연일 의회에서 청문회를 개최했지만 레이건 대통령이 청문회에 섰다는 이야기도 어떤 도의적, 법적 책임을 졌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을 털면 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을 털었다는 소리도,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대통령을 털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 독일이나 미국 같은 선진민주국가에서는 심지어 권력형 비리 관련 혐의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이나 수상을 엄벌하지 않을까요? 선진국의 언론이나 검찰은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오히려 엄정한 보도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것일까요?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지난 민주 정부 10년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보복 사정은 없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양윤재 부시장이 50억을 받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혐의로 구속되고 징역 5년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양부시장을 털고 또 털었다면 어땠을까요? 이명박 전 시장의 최측근인 양 부시장이 뇌물을 받았는데 그 상사인 이 전 시장이 이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이 시장을 소환조사하고 그의 판공비까지 수사를 벌였다는 어땠을까요?
당 시 수구언론은 유죄를 받은 범죄행위 앞에서 이명박시장에 대한 정치탄압이라며 핏대를 올렸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검찰은 뇌물수수자의 상사인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에 대해, BBK에 대해, 도곡당 땅 문제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에서 철저히 파헤치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권력 앞에 당당하지 못했던 검찰이 과거의 권력에 대해선 어찌 이렇게 치졸할 수 있는지요.
선진국에서 전직 대통령이나 수상에 대해 관대한 이유는 원한의 정치를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정치보복은 한번 시작하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직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게 이런 식의 정치보복을 하면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지지자들은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에 의해 정치보복을 당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국민의 원한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게 되고, 국민통합은 요원하게 됩니다. 현직 대통령은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고, 반대편은 정치보복을 위해 정권을 잡으려고 사생결단을 하겠지요. 양 진영이 원한의 정치를 하게 되면 대를 이어 비극적 희생이 이어질 것입니다.
참여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는 청산되지 않은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음으로써 구원을 풀고 화해와 용서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 검찰은 누구보다도 깨끗했던 전직대통령을 범죄자로 가정하고 먼지가 나올 때까지 털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건 혐의가 발견되어야 수사를 하는 수사 원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피의사실 공표는 범법행위입니다. 미래로 가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단지 과거를 파헤쳐 현재의 문제를 덮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장자연 문건, 용산 참사, 신영철 대법관 사건, MB 언론 악법 및 언론 사장 측근 인사, 이 모든 불합리를 실종시키려는 것이 검찰의 의도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검찰수사는 아무리 파헤쳐도 노 전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먼지는 한 톨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이 정말로 깨끗했다는 인식만 강화시켜주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하겠다는 것은 검찰이 인륜을 저버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전직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민에 대한 모욕이고 도전입니다.
<검사의 정치능멸이 MB식 법치?>
조선일보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까지도 추앙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취지는 대통령의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계승하자는 취지일 것입니다. 대통령의 공과는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정치는 실종되고 검찰이 정치를 능멸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정작 감시해야 할 실세권력은 봐주면서 만만한 전직만 털고 있습니다.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기세를 올리는 MB계 한나라당 의원들, 정권이 바뀌면 그들은 검찰의 칼끝을 피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결국 노 대통령의 지지자는 정당이나 이념과 상관없이 이 원한을 갚아줄 후보에게 투표하게 될 것이고, 국민의 여론과 압박 때문에 차기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일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생산적인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MBC의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찌질이 남자들은 우리에게 매주 즐거운 기쁨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에게도, 자신감을 잃은 사람에게도 창조적인 힘과 용기를 줍니다. 하지만 인륜을 저버린 검찰의 무한도전은 원한의 정치의 악순환을 촉발시켰을 뿐입니다. 누가 이들의 <무한도전>을 멈출 수 있을까요? TV는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지만, 정치검찰의 불공정 수사, 불법행위는 과연 누가 처벌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MB식 법치입니까?






조병갑을 위한 변명
조광환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학산여중)이 청소년을 위해 집필 중인 '(가제)조병갑 위한 변명'의 일부입니다.

' 역사관'(줄여서 史觀)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죠? '역사관'을 간단히 정의하면 역사에 대한 견해나 역사를 생각하는 방식을 의미한답니다. 한 개인의 삶에 방식 또는 인생에 대한 관점을 인생관이라 하듯이 개인의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역사관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역사관은 이념 체계 혹은 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특정한 견해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리고 비슷한 용어로 '역사의식'이 있는데 이는 당대에 해결하여야 할 문제를 역사적 과제로 생각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해결해야할 문제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은 무엇일까요?

아마 여기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게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 해답을 지금의 현실과 비슷한 과거의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란 바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아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전봉준'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전봉준'의 대척점에 서 있는 탐관오리의 대명사 고부군수 '조병갑'을 말합니다. 또 부정부패의 표상이 된 '조병갑'을 너나 없이 지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오욕을 '조병갑' 혼자서만 져야하는 것일까요?

이에 조병갑은 매우 억울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조병갑은 1898년 8월 18일자 독립신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해명성 기사를 실었습니다.

" 민요는 고부민요 수월전에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사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 때 감사 김문현씨의 등보가 있었으니 고부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의 탐혹을 못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조병갑씨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안핵사 이용태·염찰사 엄세영·감사 김문현 쩨씨가 다섯 번 사실하였으되 소위 장전이라 이르던 1만6천냥 내에 2천8백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만3천2백여냥은 보폐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씨가 빨리 장계를 하였더라면 조병갑씨는 다만 민요로 논감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씨가 무단히 석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간 조병갑씨로 하여금 오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조병갑은 시대를 탓합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한 말처럼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벼슬만 하면 마음껏 백성을 수탈하던 시대에 자신보다도 몇십 배 더 수탈한 중앙의 고관대작들이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조병갑은 조무래기에 불과한데 하필 자신만 지탄받을 일이 뭐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위 글에서도 안핵사 이용태가 1차 봉기 후 고부로 들어와 사태수습을 3개월이나 질질 끌었던 바람에 2차 봉기가 일어났다면서 책임은 이용태에게 있고 조병갑 그 자신은 억울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병갑은 정말 그의 주장대로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일까요?
조 선시대 평민들이 지는 세금을 통칭하여 삼정이라 합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환정)을 일컫는데 그 중 전정이란 농토에서 나오는 수확량에 부과한 세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토지에 대한 기본세 이외에도 각종 부가세가 징수되어 농민들은 엄청난 부담을 져야했습니다. 예컨대 관리 식사비, 서원 제사비, 감사 생활비, 가마수리비, 신관 수령의 부임 여비 등 규정 외의 항목으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 밖에도 지방관아에서 행하는 잡다한 행사비용은 물론, 기생을 끼고 음풍농월하는 유흥비까지 부가 세목에 추가했답니다. 그리하여 전세의 수탈은 1곁에서 나는 수확은 평균 6백 말 정도였으므로, 전정에 의한 착취 량만 하더라도 수확의 약 3분의 1에 육박했습니다.

군정이란, 군대에 가야하는 장정(16세∼60세에 해당하는 평민 남자)이 군역에 직접 나가지 않는 대신 국가에 납부하는 군포(옷감)를 말하는데, 조선 후기에는 각종 명목으로 징수액을 늘려 장정 한 명이 부담하는 군포의 양도 점차 불어났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백골 징포, 어린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거두는 황구첨정, 군역을 피하여 도망간 사람의 이웃에게 군포를 떠맡겨 수탈하는 인징, 일가 친척에게 넘겨 빼앗는 족징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목민심서』병전에 군정에 대한 당시 실상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습니다.

애절양(생식기 자름을 슬퍼함.)

갈맡 마을 젊은 아낙의 곡소리 기나긴데
현문(현감이 근무하는 관아의 문) 향해 곡하고, 푸른 하늘 울부짖누나.
남편이 출정 나가 돌아오지 않음은 오히려 있을 법
하건마는
예부터 사내가 생식기 잘랐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오.
시아버지 돌아가셔 이미 상복을 입은데다,
아이는 아직 배냇물도 씻지 않았는데,
세 사람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나요.
처음으로 호랑이 같은 문지기에게 가서 하소연해 보려 함에
이정(지금의 이장 정도되는 직위)이 포효하며,
마굿간에서 소를 끌고 나갔지요.
칼을 갈아 방에 드니, 피가 자리에 흥건한데
아이 낳아 곤궁을 만났다고 스스로 한탄하던걸요.
더운 방에서 궁형을 행하는 것이 어찌 허물이 있지 않으리요.
민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거세했던 일도 진실로 또한 슬픈 일이라오.
산 것이 살고자 하는 이치는 하늘이 부여해 준 것 이라서
하늘의 도는 사내를 만들고 땅은 계집을 만들거늘
소와 돼지 거세함도 오히려 슬프다고 말할진대
하물며 백성들이 자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서랴.
세도 있는 집에서는 일년 내내 풍악을 울리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조각 축나는 일 없다네.
우리 백성들 똑같아야 하거늘 어찌해서 가난하고 부유한가?
나그네는 창가에서 거듭 시구편을 읊조린다오.

다산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적고 있습니다.

" 이것은 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마 지막으로 환곡이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아의 곡식을 대출하였다가 추수할 때 거두어들이는 제도인데 점차 고리대가 되어 관리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환곡에서 가장 수탈을 많이 당하는 사람들은 소농과 빈농이었고, 이들은 전세와 군포의 부담까지 짊어져 3중의 고통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녀를 올려야 일이 시작되고, 돈을 보내야 일이 추진되니, 돈 없고 여인 없는 사람은 어디에 기댈고(送上美女主動辦 送上錢財推着辦 無錢無女何處). "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중국의 실정을 한탄한 노래로 과거 봉건왕조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얼마 전 중국 최고 인민검찰원 기관지 검찰일보는 이런 탐관오리들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도록 "탐관오리들의 여덟가지 특징" 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답니다.

이에 따르면 탐관오리의 특징 중 첫째는 포장에 능하다(善於包裝)는 것입니다. 노동영웅.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등 감투를 내세워 자신의 구린 구석을 감춘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호색(好色)이며 셋째는 호색 결과로 아내와 도둑 및 애인을 무서워 하는 "세가지 두려움" 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무서워하는 이유로는 자신의 불륜 때문에, 도둑을 무서워하는 이유로는 숨겨 놓은 부정한 재물로 인해, 그리고 애인은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지 뭡니까.

넷째는 단명(短命)이랍니다. 범죄가 드러나 사형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데다 언제 죄수가 될지 몰라 우울증에 시달리며, 심한 경우 두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 섯째는 종교욕과 미신입니다. 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사당만 보면 향불을 사르려 하고, 불상만 보면 목을 조아린다" 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인색이랍니다. 탐관오리일수록 남을 돕는 자선에 인색하며 힘없는 백성에게는 아주 냉정하다는 것이지요.

일 곱째는 도박입니다. 탐관오리의 상당수가 도박 때문에 부정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조사됐답니다. 여덟째는 가난한 집안 출신 가운데 깨끗한 관리도 많지만 탐관오리들은 공통적으로 출신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가치관이 정립되는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돈에 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죽했으면 지난 1998년에 이웃나라 중국의 총리로 취임한 주룽지(朱鎔基)는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내 것을 포함해 100개의 관(棺)을 준비하라"며 청렴한 정치를 하겠노라는 배수진을 쳤고 실제로도 그는 각종의 부정부패로 치부한 공무원 수백명의 옷을 벗겼으며 악질범죄일 경우에는 가차없이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겠습니까?

그 런데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먼 옛날이야기나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작년에 `반부패 국민연대'가 서울의 중고교생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부패·반부패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우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부패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91%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실로 충격적인 결과 발표가 나왔기 때문이지요.

또 이 설문에 답한 학생들의 72.5%는 우리나라를 부패 순위 1∼20위군에 속하는 국가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이지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공 직자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한다면 오늘 당장 사직하고 장사를 해야 하지요.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도 "높은 자리는 과녁과도 같아서 누구나 거기를 향해 활을 쏘고자 하니 항상 처신에 조심해야 한다"고 공직자, 특히 고위공직자들의 처신에 대하여 강조하셨던 것이다.

또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 designtimesp=4520>에서 탐관오리를 `자벌레'라 했는데 이 `자벌레'는 먹을 것이 보여야 기어가고 겁을 주면 움츠리고만 있기 때문이랍니다. '세계화'랍시고 아무리 기술개발을 앞세우고 경쟁력을 부르짖어도 국가기구나 관료들이 기업의 경쟁력을 빼앗을 때는 방법이 없다. 정상적 이윤을 챙기기도 힘들게 출혈경쟁을 하면서 수출하는 기업에 손내미는 정치인들이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특히 근로자들의 정당한 임금인상이나 복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업들이 정치인들에게는 수 백억 대의 대가성 뇌물을 주고받는 오늘날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애절양'은 흘러간 옛 시 구절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들려 오는 현재 진행형의 외침입니다.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은 위의 삼정을 이용한 수탈은 물론 다양한 명목으로 고부군민들에 대한 불법적인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심문 당한 기록인 공초를 보면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형틀에 묶어놓고 있지도 없는 죄를 물었다고 합니다.

순박한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가 무서워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라고 했다가는 어떤 엄청난 죄를 뒤집어쓸지 모를 일인지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매우 쳐라"하는 호령과 함께 매가 날아들었지요.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모진 매를 맞고 기절하면 물을 퍼부어 정신이 들게 한 다음 머리 속으로는 주판알을 튕기면서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고 되물었답니다.

이 때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농민에게 사또의 영원한 콤비 이방은 엄지와 인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싸인을 보내고 그제 서야 눈치를 알아차린 죄인 아닌 죄인인 농민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라고 죄를 시인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들이 풀려나게 된 것은 없는 죄를 불고 군수가 흡족할 정도의 물건을 갖다바친 이후였습니다. 이 때 갔다 붙여진 죄명은 부모에게 불효한다,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다, 음행을 저지른다, 잡기를 일삼는다 등 갖가지 명목이었답니다. 이렇게 강탈한 재물만도 2만 냥에 달했다.

횡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면세를 약속하고 농민에게 황무지를 개간하게 한 뒤, 정착 추수기에 가서는 세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선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천여 냥이나 되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그는 대동미를 쌀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 나쁜 쌀을 사다 바쳐 차액을 착복하였다. 이렇게 백성을 수탈하고, 나라 재정을 파먹었으니, 그는 관리가 아니라 강도였지요.

마침 선정비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하지요. 경상남도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라는 이름의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 7월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1892년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갖은 포악한 정치를 자행한 그가 불과 몇 년 전함양군수로 재직했을 때 위와 같은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에 의구심이 들지요? 사실 우리 나라에 산재해 있는 '영세불망비'나 '선정비'라는 이름의 공덕비들의 대부분은 그 지역주민들이 수령의 바른 정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세운 비라기보다는 강제에 의하여 세워진 것들이랍니다.

`설화 한국의 역사'에 실려 있는 선정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 를 세우는 것은 왕이 승하하면 장사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돌을 세운다는 것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에서 옛 사람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워왔다. 이것을 민간에서 모방하여 관찰사나 군수, 현감에 대하여 그들의 시책이 잘 되었을 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우게 됐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吳章)이 군수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청백리인 최석(崔碩)이 선정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선정비의 시초라 생각되며, 최석은 승평부(昇平府)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고려시대 풍속으로 태수가 바뀔 때면 고을 백성들이 태수에게 기념으로 말 8필을 주었답니다. 이것은 일종의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최석은 벌써 그 뜻을 짐작하고 그가 승평부의 태수를 그만두고 돌아 올 때 전부터 내려오던 관례대로 말 8필을 받았습니다.

그 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도중에 말이 망아지를 낳아 9필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짐을 풀고 최석은 망아지까지 9필의 말을 도로 보내 주었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감격하였고, 청백리로서 한 번 모범을 보이자 그런 일을 그 후부터 못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우니 그의 선정을 칭송한 선정비라 세상의 사람들은 이것을 팔마비라 하였답니다.

이 러한 선정비가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작스레 많아졌고, 명종 때에 벌써 한 고을에 4~5개의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세운지 30년 이내의 것은 모두 뽑아 버리라고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선정비 건립의 난립을 막으니 백성들이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하니 그 폐단이 오죽 심했겠습니까?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00의 영세불망비"니 "... 송덕비"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에는 정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진심에서 세운 선정비도 있겠지만, 크고 글자도 많이 새겨져 있을수록 백성들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된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 싶습니다. 거리마다 선정비요, 골목마다 송덕비라. 선정비가 수천개나 되었으니 얼마가지 않아 선정비의 주인공이 다른 곳으로 가고 그의 세력이 떨어지면 비석에 대한 파괴행위가 심했는데, 이런 일로 그 비석은 근처의 논두렁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논물을 막는 물고가 되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태인 피향정 내에는 조병갑이 저지른 탐학의 징표로 '조후규순영세불망비'가 윗부분이 일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조병갑은 대대손손 부친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으니 영세불망(오래도록 세세손손 잊지말자)은 영세불망인 셈입니다.







1893년 11월 전봉준등 20여명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하여 봉기할 것을 다짐한 것으로 전해지는 통문이다. 주모자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해 둥글게 사발모양으로 서명하였다. 결의사항으로는 1. 고부성 격파. 군수 조병갑 효수 2. 군기창과 화약고 점령 3. 인민을 침어한 탐리 징치 4. 전주감영 함락 후 곧바로 서울진격 등이다.





이러한 비는 대개가 형식적이며 관례적으로 세우는 것이고, 꼭 그가 재임 시에 행정을 잘해서 세우는 것은 아니어서 그 지방민을 못 살게 한 자에게라도 타의에 의하여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조규순(趙奎淳)의 공덕비를 꼽을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조병갑이 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 조규순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 000여 냥을 거두어 태인 태성리 피향정에 세운 선정비이다. 당시 농민들에 의해 그 비의 ‘병갑(秉甲)’이라고 쓴 부분이 훼손되어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버지를 위한다고 하였던 일이 도리어 그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이쯤 되면 이보다 어리석은 불효도 드문 셈이다. 그래서 위정자들은 명심할 일이 있다. 민심은 천심이다. 이는 지나온 역사가 고스란히 보여준다. ‘저 해는 어찌 떨어지지 않고 저 위에 있나.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저 해와 함께 망하였으면’. 위정자는 그들을 바라다 보는 백성들의 마음을 분노로 차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정자들은 이 명백한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


"탐관오리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보다"


참여연대가 발간하는 월간지 ‘참여사회’에 조기숙(사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조 전 수석은 그의 증조부가 조선 말기의 대표적 탐관오리인 조병갑 고부군수란 사실이 모 월간지의 폭로로 알려진 뒤 기자들에게 해명 이메일을 보내는 등 다양한 경로로 대응한 바 있다.

참여연대 회원인 박상표(38·수의사)씨는 참여사회 11월호에 ‘탐관오리 조병갑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보다’란 글을 기고했다. 박씨가 문제삼은 것은 조 전 수석의 해명 이메일 중 “조병갑 군수가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게 아니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부분. 그는 “조 전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있는 과거사 청산 대상자 후손의 논리와 너무 똑같다”고 비판했다.

박씨에 따르면 조병갑은 무죄 선고를 받은 게 아니다. ‘승정원일기’에는 1894년 조병갑이 혐의를 부인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홍집·서광범 등 조정 대신들이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가볍다”며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이듬해 유배지에서 서울로 도로 압송돼왔다.

문제는 그가 서울로 끌려온 다음부터. 당시 일본, 러시아 등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암투가 치열하고 곳곳에서 변란이 끊이지 않아 정국은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조병갑의 재판 역시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는 1895년 7월 사면령을 내려 조병갑을 석방했다. 이때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선생은 “죄인들이 모두 처벌을 면했건만 아무도 항의하지 못한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박씨는 “조병갑에 대한 조정의 대처는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관보’ 등 기본적 사료만 들춰봐도 바로 확인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조 전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얕잡아봐도 한참 얕잡아본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조 전 수석 개인으로서야 이번 일이 억울하겠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는 교훈까지 잊어선 안될 것”이란 경고로 글을 끝맺었다.

세계일보 인터넷뉴스부


[현장에서] ‘입맛’따라 재단한 ‘동학과 조병갑’


[한겨레]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 11일 <문화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누구의 증손녀라는 것보다 현재 살아가는 모습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유족회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발언은, <월간조선>의 지난 11월호,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제목의 보도가 ‘새로울 것’이 없으며, 연좌제 측면에서도 부적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또한 “(조 전 수석은) 할아버지와 반대되는 길을 걸은 평소 행동으로 보아 충분히 동학농민군의 우군이라고 본다”고도 말했다. 누구의 후손이냐 아니냐보다 오늘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의 발언에는 ‘조병갑-조기숙 논란’에서 빚어진 ‘양쪽의 과도함’들을 정리하는 의미가 담겼다. 이 문제는 조 전 수석이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사실과 함께, 귀양 갔던 조병갑이 대한제국 고등재판부 판사로 복직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월간조선>의 보도에서 비롯됐다.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앞장선 지식인이자 ‘친일청산’ 등 역사 바로잡기 운동을 펴고 있는 청와대의 핵심 브레인 출신에게 <월간조선>이 연좌제 성격의 기사로 한방 먹인 꼴이었다.

그런데 조 전 수석도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월간조선> 기사가 나가자 기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조병갑이)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며 증조부를 감쌌다. 편지가 알려지자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느냐”라고 조 전 수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던 끝에 조 전 수석은 지난 9일 동학혁명 유족회 행사 참석을 허락받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논란은 그럭저럭 정리될 것도 같다. 입맛에 맞춰 역사를 과도하게 활용하는 일은 줄었으면 좋겠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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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승려들의 밤샘 도박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성호스님이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룸살롱에서 성매수한 사실을 추가로 밝혔다.

성호스님은 15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명진스님과 자승스님은 과거 신밧드 강남 풀코스 룸살롱에 가서 성매수한 사실이 있다"며 "이것을 가지고 조계사 앞에서 3달 넘게 1인 시위를 벌인 적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성호스님은 "명진스님은 자기만큼은 (성매수를) 한 적이 없으며 좀 빼달라고 해서 빼드렸다"고 하면서 "자승 스님은 한 마디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성호스님은 승려들 사이에 `집단 폭행`이 일상화 되어 있는 현실도 언급했다. 성호스님은 "1인 시위를 할 때 다른 승려들이나 조계사 신도들은 저를 진짜 격려해줬지만 진짜 격려해줘야 할 토진스님은 총무원 스님들과 함께 저를 집단 폭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성호스님은 "과거 자승스님이 원장에 출마하기 전 처자식을 숨겨놓은 은처승이고 승랍을 3년 동안 도둑질한 도둑놈이라는 문건이 전국적으로 배포가 됐다"며 "뒤에서 제가 만들고 뿌렸다고 해서 집단 폭행을 당했다"고 덧붙였다.

최근 불거진 도박 사태에 대해 성호스님은 "외국에 나가서 필리핀, 마카오, 라스베이거스 등지에서 승복을 갈아입고 도박을 한다"며 "외국 나가서 포커로 몇 백억 잃은 스님도 있다"고 밝혔다.

한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15일부터 100일 동안 108배 참회정진을 시작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95110&url=n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BBK 의혹’ 제기로 22일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이 확정돼 오는 26일 수감을 앞두고 있는 ‘BBK 스나이퍼’ 정봉주 전 의원이 23일 명진스님이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108염주와 격려하는 문구가 담긴 사진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정봉주 전 의원이 23일 자신의 트위터에 공개한 명진스님의 선물

정봉주 전 의원은 이날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명진스님께서 주신 108염주와 영치금입니다”라고 사진을 공개하면서 “염주는 백두산 주목 나무를 손으로 일일이 깎아 만든 것입니다. 스님 잘 있다 나오겠습니다. 봉도사 합장 넙죽~~”이라고 감사를 표시했다.

영치금이 담겨 있는 듯한 봉투의 표지에 명진스님은 “달려라 정봉주! 울지마 정봉주! 탈옥해 정봉주!”라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세상.”이라고 안타까워하며 정 전 의원에게 격려와 위로를 전했다.

한편, 정봉주 전 의원은 22일 오후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열린 명진스님의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도서출판 말글빛냄) 출판기념 사인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검찰과의 형집행 협의 문제 등으로 불참했다.

이날 정 전 의원이 사인회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보문고는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팬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MB정부,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명진스님의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으로, 우이독경(牛耳讀經)을 빗댄 서이독경(鼠耳讀經), 즉 ‘쥐 귀에 경 읽기’라는 공격적 부제를 달아 눈길을 끌었다.






봉은사 주지를 지냈던 승려 명진이 이명박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책을 내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계종 소속의 한 승려가 명진의 승적박탈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지난 달부터 벌여온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전북 진안군 마이산(山)에 위치한 금당사(金塘寺) 주지를 지낸 바 있는 성호스님은, 지난 달 21일부터 조계사 옆에서 이같은 1인시위를 벌여 왔다. 명진이 룸살롱에 출입한 ‘파계승’이라는 것이다. 

명진이 룸살롱에 출입한 것은 사실로 확인됐다. 그 스스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룸살롱에 갔던 것은 사실”이라며 “가지 않아야 할 곳에 가기는 했지만 중으로서 계율은 지켰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호스님은 “룸살롱에 승복 입고 갔다는 자체가 자신이 파계승임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해당 룸살롱 ‘신밧드’(현재는 ‘아프리카’로 바뀌었다고 함)는 “2차(?) 가는 전문 술집”이라고 했다.  

그는 “명진과 자승(조계종 총무원장. 그도 ‘신밧드’ 출입을 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을 단죄하고 축출멸빈(불교계서 영구 추방)을 위한 기폭제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좌파승려들이 모인 ‘실천불교승가회’가 현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다”며, “실천불교승가회 해체”도 역설했다. 

사 실 승려의 몸으로 술집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논란거리인데, 여성접대부가 있는 룸살롱에 갔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적어도 당시 룸살롱 아가씨들에게 설법하러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공간에서도 “명진씨 성질 나는데 신밧드 룸싸롱에서 발렌타인이나 한통깝시다”라는 등, 이와 관련한 비아냥 글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스님들 성매매한 '룸살롱' 이런 곳이었다니"

"룸살롱이 불교계를 무너뜨렸다"

[아시아경제 천우진 기자] 서울 강남 룸살롱 하나가 불교계를 '아비규환'에 빠트렸다. 덩달아 강남 룸살롱업계가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그야말로 강남 룸살롱 수난시대다. 이번엔 대기업 회장이나 연예인이 아니라 성직자인 승려들이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도 조계종 종단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다. 룸살롱에서는 그저 술만 마시지 않는다. 중생들의 징글맞은 오욕칠정이 다 꿈틀댄다. 수행정진해야 할 승려들도 그곳에선 무참히 허물어졌다.

문 제의 장소는 신사역 4번 출구 인근 'S 룸살롱'이다. 현재는 'A 룸살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진 스님과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2001년 A 룸살롱에서 술은 마신 것은 물론 성매매를 한 장소로 15일 알려지면서 이목이 집중됐다.

이 룸살롱은 골목 뒤편에 자리 잡은 보통 룸살롱과는 다르다. 강남 번화가 대로변에 입구가 활짝 열려 있다. 건물은 5층 규모다. 붉은 벽돌에 외벽이 낡아 허름한 모습이다. 외관도 특별한 인테리어가 안 돼 있다. 간혹 유명한 룸살롱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냥 지나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건물 뒤로 돌아서면 넓은 주차공간에 또 다른 A룸살롱 입구가 있다. 룸살롱과 붙어있는 모텔로 들어서는 곳이다. 간판도 큼직해 한눈에 들어온다.

S룸살롱은 2001년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 여종업원이 '2차'를 함께 제공하는 '풀살롱'으로 유명했다. 음주와 성매매를 패키지로 제공한다는 의미다. 한 업소에서 술을 마시고 호텔이나 모텔 등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하는 룸살롱과는 달리 모텔이 붙어있어 구조상 한 건물에서 술 접대와 성매매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

고 급 룸살롱의 대명사인 '텐프로'나 그 아래 등급인 '쩜오'가 연예인급 외모를 갖춘 여종원들을 고용한 것이 특징이라면 풀살롱은 한 업소에서 2차까지 할 수 있다는게 다르다. 승려들이 다녀간 곳으로 알려진 S룸살롱은 50개 넘는 룸을 갖추고 소속된 여종업원만 200명 이상이라고 한다.

당시 명진 스님과 자승 스님은 17년산 발렌타인 세병에 여종업원 네명과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룸살롱 종업원은 "17년산 발렌타인 세병과 여종업원 네명으로 풀코스면 못해도 500만원 이상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문 제가 불거지자 명진 스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룸살롱에 간 것을 인정하며 "죄송합니다. 질책은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사죄했다. 다만 성매수 의혹에 대해서는 계속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S룸살롱이 강남 업계에서 풀살롱으로 유명한 곳이라서 승려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은 쉽게 사그라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룸살롱 뒤편에 이어진 먹자골목 음식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여기는(A룸살롱) 풀살롱으로 유명해서 사람들이 다 그러려고(2차)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승복을 입고 룸살롱을 찾는 사람이 있었냐는 질문에는 "대부분 차를 타고 드나드는데 어떻게 알겠냐"며 답을 피했다.







명진스님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히며 야권은 문재인 전 비서실장 같은 인물을 발굴해 박근혜 전 대표와 맞서야 한다고 주장,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15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명진스님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불교계 입장에서 보면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 잘못했으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지 너무 뻔뻔하다"고 맹비난한 뒤, "그에 비하면 박근혜 전대표는 진정성이 있다. 나는 좌고 우고 떠나서 진정성 있는 사람이 좋다"며 박 전 대표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다.

명진스님은 그러나 과거에 친분이 두터웠던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해선 "이런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 사람 안 믿는다. 자기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정당을 떠나면서 '유신 잔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냥 박근혜가 너무 강해서 한나라당에서는 가망성이 없어 떠난다고 했다면 나는 지금도 그 사람 지지했을 거다. 그런데 자기가 물 떠먹던 우물에 침뱉고 떠났다"라고 비판한 뒤, "차라리 야권에서는 문재인처럼 진정성 있는 인물을 발굴해서 박근혜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명진스님은 향후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선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그때는 봉은사 주지보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꼭 해보고 싶다. 원래 종정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힘이 없더라. 불교를 바꾸려면 총무원장 자리가 꼭 필요하다"며 "그러나 지금처럼 선거를 통해 뽑는 총무원장 자리는 관심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가 아니면 무슨 방법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선 "나야 모르지"라고 답했다.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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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2 22:10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결국 몸싸움을 넘어 폭력으로 점철됐다. 중앙위원 구성을 두고 난항을 거듭하던 중 결국 참관인과 일부 중앙위원 등 수백여 명이 단상위로 올라 밤 10시 현재 더 이상 중앙위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표단은 자리를 피했다.

심상정 공동대표가 오후 9시 40분 경 강령 재정안 통과를 선포하는 순간 일부 중앙위원들과 참관인 수십 명이 순식간에 단상 위로 올라선 것. 진행요원들이 이를 저지했지만 단상 난입 인원이 200여명을 넘어서며 단상은 결국 당원들의 시위 장소가 됐다.

오후 9시 30분경 중앙위 시작 후 7시간 가량이 흘렀지만 중앙위원 명단 교체 의혹 논란이 여전한 상황에서 한 중앙위원이 “정회하고 성원을 확인하자”는 제안을 했다. 심 공동대표는 이를 중앙위원 표결에 붙였다. 결론은 630명 제적에 33명 찬성. 제안이 부결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 공동위원은 부결을 선언하고 제 1호 안건인 ‘강령개정안 심의 의결의 건’ 논의를 이어갔다. 이날 논의해야 할 안건이 하나도 처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안건을 두고 질의와 토론을 이끌었지만 모든 논의가 ‘중앙위원 선임’문제로 흘러갔던 상황.

심상정 공동대표는 재차 “개정안에 대한 토론이 있느냐” 물으며 진행요원들에 “토론이 있는지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에 몇몇 중앙위원들은 비표를 흔들며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심 공동대표는 “토론할 분 계시느냐”, “만장일치로 생각해도 돼겠느냐”물었다. 중앙위원 다수가 “예”라고 답하자 심 공동대표는 다시 한번 확인하며 “만장일치로 안건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그 순간 일부 중앙위원들과 참관인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진행요원들이 이를 저지했지만 단상 난입 인원이 100여명을 넘어서며 단상은 아수라장이 됐다. 프로젝트 화면이 꺼지고 일부는 비표와 물병 등을 단상에 던지기도 했다. 회의장 곳곳에서는 이를 저지하는 이들과 난입을 시도하는 이들로 몸싸움이 일었다.

이에 대표단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결국 통합진보당 중앙위는 더이상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속보)또.. 통합진보, 2차 폭력사태 발생

입력 : 2012-05-12 오후 11:35:56

[뉴스토마토 박수현기자] 오후 11시 30분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가 회의장에 들어섰지만 당권파 당원들이 다시 한 번 단상에 올라 몸싸움이 벌어졌다.
 
심 대표는 마이크를 잡고 회의를 속개하려 했으나 득달같이 달려드는 당권파 당원들의 행패에 유 대표와 급히 자리를 피했다.
 
당권파 당원들은 2시간 가량 전에도 단상을 덮쳐 유시민 조준호 공동대표를 폭행해 파문을 일으켰다.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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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들이 전세 버스 두대 나눠 타는거는 예전에 정신대 라던지 이런거 참 오랫만에 보는 광경 아닙니까?"


룸냄비들은 이런건 봤어요 야유회 6월6일날

우리 그때 갔었지

.

서울 수성동에 국가인권위를 상대로 항의해서 방문하고 데모질하고 그랬나봐

.

보G 노는 계집들이 경찰을 고발했습니다

.

고발 뻔해 그거아냐 꽁SSIP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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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의 신앙고백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었어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마음씨로 더욱 사랑받는 탤런트 한혜진 씨. 지난해 <주몽>이라는 국민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그가 언론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공개해 관심을 끈다.

그는 지난 15일 CTS TV의 간증 프로그램인 ‘내가 매일 기쁘게’ 녹화 현장에서, 힘들었던 가정사와 연예계 활동,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신앙의 성숙에 대해 전했다.


“‘헛 것을 믿었구나’라고 생각했죠”

듣기로는 한혜진 씨 집안이 많이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혹시 신앙을 가지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까요?

- 어머니가 저희 집에서 처음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당시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하시고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외숙모께서 교회에 한번 나가보라고 하셨대요. 어머니는 근처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죠.

어머니가 40일 작정기도를 들어가시면서, ‘집안에 붙여진 빨간 딱지들을 떼어주시면, 당신이 있다는 것을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하셨대요. 작정기도 후 그것들이 다 떼어지니 아버지도 함께 믿을 수 있었다고 해요.

그 이후 저희 세 자매는 멋모르고 교회에 나가 놀았어요. 그때가 5살 때였죠. 초등학교 때에는 교회에서 찬양하고, 부회장을 맡으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번은 오후 예배를 빠져서 부장집사님께 엄청 혼났거든요. 그 뒤 그 집사님이 무서워 한동안 교회를 못 나갔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시게 되면서 집안 상황은 좀 나아졌나요?

- 아니요. 계속 나빠져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적도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교수님께 ‘아버지께서 누워계셔서 점심을 챙겨드려야 하는데 출석 인정을 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드렸죠. 그랬더니 교수님이 ‘네가 가는 것은 좋은데, 출석체크는 해 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시는 거예요.

집에 오는 길에 엄청 울었어요. ‘정말 이 세상에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와서 아버지를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더 독해졌던 것 같아요. 돈에 대한 욕심이나 일에 대한 욕심이나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어린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도 할 수 있었겠어요.

-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밉지도 않았고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했어요. 그냥 ‘우리가 헛것을 믿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숨 쉴 구멍을 조금도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시장 창고를 개조해 살고 있었는데,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제가 연기자 생활을 할 때도 거기서 살았으니까요.

이렇다보니 제 자존감도 너무 낮았어요. 오디션 떨어지면 밤잠을 자지도 못하구요. 주위 연예인들이 마냥 부러웠어요. 딴에는 연기자라고 어머니께 ‘여기서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강남에서 살자’고 그랬죠. 그 때 저희 집에 딱 천만 원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월세를 많이 내더라도 가자고 하셨어요.


희망의 씨앗이 싹트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신앙을 회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 제가 2004년에 아침드라마 <그대는 별>을 찍을 때였어요. 일은 하는데, 회사에서 출연료를 안 주는 거예요. 끝내는 힘들다고 저를 놓더라구요. 당장 드라마는 찍어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어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요. 그때 하나님이 생각났죠. 지금의 심정을 얘기할 분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새벽에 나와서 교회를 갔어요. 어릴 시절 사랑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거죠. 그때 목사님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요. ‘세상에는 저런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저 분은 날 위해 저렇게 하셨구나’라는 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 다음날부터 ‘하나님 저 좀 만나주세요’라고 기도하니까 평안을 주시더라구요.

그 이후 신앙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 계속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을 너무 알고 싶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청년부를 나가라는 말씀을 주시더라구요. 사실 저는 연기자고 낯도 많이 가려서 과연 청년부를 나갈 수 있을까 했는데, 언니들한테 같이 가자고 해서 새해 첫날 결단을 하고 함께 나갔어요. 청년회에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성령님이 누구신지부터 배우고 모임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그 안에서 중보기도의 힘을 알게 되고, 이전에 막혀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게 됐죠.

하지만 그렇다고 어려웠던 상황이 한 순간에 해결된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 아침 드라마가 끝나고 일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묻고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연기자를 안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까지 했죠. 때마침 어떤 연극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술집으로 불러내서는 ‘야, 나 너한테 한 푼도 줄 수 없어, 하고 싶음 하고 하기 싫음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거예요. 너무 슬퍼서 ‘왜 이리 힘든 일만 주시냐’고 주님께 기도하며 울었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아침드라마로 신인상 후보에 오른 거예요. 저 같은 신인에게는 드레스를 협찬해주지 않는데, 겨우 어렵게 드레스를 협찬 받아서 시상식을 갔어요. 신인상 수상자로 제 이름을 부를 때 잘못 부른 줄 알았어요. 너무 놀랍고 감격해서, 이 감격을 어떻게 얘기할까 했는데 하나님이 먼저 생각났어요.

바 로 그 때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그때부터 <굳세어라 금순아>와 <주몽>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긴 했지만 너무 못 본 거예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주시면 하자’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기다리니까 하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죠. 감독님을 뵈니까, 수심이 가득했지만 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별 걱정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주신 거죠. 그러면서 예전엔 돈 욕심이 많았는데, 그 욕심이 없어졌어요. 그런 점이 더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벼랑 끝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자체가 큰 힘이 돼요.


주몽, 힘들었지만 도약을 이루게 해 준 작품

<주몽> 얘길 안 할 수 없죠. 정말 대단한 드라마였는데, 종영 후 반응은 어땠나요?

-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구나 라고 느낀 게, 지금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 방영되고 있어요. 이란에도 방영될 예정인데, 현재 <대장금> 시청률이 90%래요. 그런 나라에 주몽이 방영된다는 거예요. 이런 게 그 나라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고, 선교하시는 분들에게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으면 선교할 때 쉬워지지 않겠어요.

북한도 다녀오셨죠?

- 북한에 ‘주몽의 묘’나 벽화 등 많은 유산이 남아 있어서 주몽팀이 함께 다녀오게 됐어요. 원래 복음의 시작이 그 땅이었는데, 지금은 한 인간을 우상시하고 신처럼 받드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어요.

호 텔에서 스위스 여성분들을 만났는데, 저희에게 한국말로 찬양을 적어달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북한 지역에 단기선교를 오셨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세계적으로 북한에 복음 전파의 뜻을 품으신 분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비해 저는 ‘가까이 있는데도 품지 못했구나’라는 부끄러움도 느끼고….

1년여의 촬영 동안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 많은 분들이 ‘시청률 잘 나오는 드라마에서 연기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셨어요. 하지만 사실은 연기자 생활하면서 최대의 고비였어요. 왜냐면 제가 그때 굉장히 사람을 두려워했거든요. 많은 악성댓글과 현장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됐어요. 물론 저를 위한 말들이겠지만, 저는 굉장히 상처도 많이 받고 자존감도 낮아지게 됐어요. 참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날마다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며, ‘왜 이 자리에 보내주셨어요’라고 원망했죠.

밖에서 볼 때는 그런 힘든 일이 있었을 거라고 보이지 않았는데.

- 많은 분들이 제가 주몽을 하면서 즐거움 속에 있을 줄 아셨는데, 저는 뭔가의 억눌림과 짓눌림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들이었어요.

저 를 칭찬하고 사랑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안 보이더라구요. 교회에서 드라마 잘 보고 있다는 인사를 하면 ‘내가 연기 못 한 것을 봤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했던 거죠. 어느 정도냐면, 연말 시상식에도 갈 수 없을 정도였죠. 그래서 불참하겠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많이 당황했어요. ‘그러면 상 안 주면 갈게요’라고 했더니 더 당황해 하더라구요.


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저에게 절대 상 주시면 안 된다’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던 거예요.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더라구요. 상을 받으러 올라가면서 어떤 깨달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뜻하심을 거부하는 것도 교만이라는 거죠.

그때 더 감동을 받았던 건 많은 수상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때문이었어요. 지수원 선배님, 승수 오빠, 한예슬 씨, 정려원 씨 등 너무나 많아 놀랬어요. ‘나만 하나님 믿고 나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교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숨겨놓으시고 이미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말이죠.

주몽 출연진과 스텝 중에도 크리스천이 많았다는데, 어려울 때 도움이 많이 됐겠어요.

- 오연수 선배님, 김승수 선배님, 진희경 선배님, 저희 아버지로 나오셨던 김병기 선생님, 나중에 투입된 탐희 언니, 배수빈 오빠도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데 다들 거부감이 없었어요. 주몽 오빠(송일국)에게 생일 선물로 성경책을 줬더니, ‘노력해볼게요’라며 웃더라구요. 그거 보면서 하나님이 오빠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을 느꼈어요. 반드시 (송일국 씨가) 구원받고 영접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다들 도움을 많이 주셨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투입된 탐희 언니의 도움이 컸어요. 원래 여자 연기자들이 처음 만나면 예뻐서 서로 견제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녹화장에서 살짝 봤는데 언니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아, 이 언니도 크리스천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언니가 먼저 김밥을 건네면서 ‘하나님 믿느냐’고 묻자 눈물이 났어요.

이후 둘이서 하나님 얘기 하면서 많이 울고, 은혜 받았어요. 이 드라마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잘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다짐하기도 했구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우리가 많이 노력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언니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해요.

주몽 하면서 한참 힘들었다고 하니,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 탐희 언니 도움이 컸는데, <주몽>이 끝나고 바빠서 자연스레 언니랑 멀어지게 됐어요. 그래서 또 자존감이 낮아져 전화도 받지 않고, 하나님이 무워서 말씀은 읽지만 남는 건 없고 그런 상태로 지냈죠.

그 러던 어느 날 하용조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병원으로 와 줄 수 있느냐’고 하는데, 거절할 순 없어서 가겠다고 했어요. 두려운 마음에 탐희 언니와 함께 갔는데, 목사님이 투석을 하느라 너무 힘든 모습이었어요.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비전을 주셨는데,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목사님이 물으셨어요. 사실은 너무 가기 싫었어요. 자존감이 너무 낮은 상태니까, ‘거기에 가서 내가 뭘 해, 신앙도 낮고’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투병 중에 계신 목사님을 보니 차마 거절을 못 하겠더라구요.


그 런데 ‘러브소나타’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함께 간 연예인분들이 20명 정도였는데, 그 분들의 신앙을 보고 많이 놀라고 도전을 받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도전을 받으면서 질투심도 느꼈죠. 그래서 ‘하나님, 저도 저들처럼 기쁘고 감사하고 싶고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요, 하나님 만나고 싶고 듣고 싶어요’라고 기도했어요. 그날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게 이거구나’라는 느낌이 들고 짜릿했어요.

그동안 신앙에 많은 성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 한혜진 씨의 신앙 고백은 어떤가요?

- 2004년에 하나님을 영접했는데, 그때는 ‘하나님은 무조건 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았어요. <주몽>할 때까지는 사랑만 주시고, 복만 주시고 하신 분인 줄 알았죠. 하지만 주몽하면서 계속 힘드니까, ‘이상하다 하나님은 이러는 분이 아닌데’라며 하나님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께 내가 무얼 잘못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됐구요. ‘하나님이 날 생각 안하시나, 왜 힘들지?’, 이런 게 느껴지니까 많이 힘들더라구요.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보내주셔서 제가 회복하고 있는 시기에요. 또한 ‘고난이나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혜진 씨의 순수하고 맑은 신앙고백은 오는 19일 밤 10시30분, 20일 오전 10시30분, 21일과 22일 오전 0시30분에 CTS TV를 통해 방송된다.
서은하기자,sarah@newsmission.com(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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