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는 외세 끌어들인 장본인"

'이완용 평전'저자가 말하는 명성황후

 


조선을 넘보던 열강을 요리한 여걸, 일제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다 잔인무도한 일본 낭인의 칼에 처참하게 시해당한 비운의 국모. 우리 역사가 그려놓고 있는 '명성황후' 상이다.

그녀의 참혹한 최후는 열강의 침략 앞에서 기울어가는 조선왕국의 비운을 상징하는 비극처럼 인식돼 왔다. 최근에는 그녀를 내세운 뮤지컬이 제작돼 해외공연까지 이뤄졌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애틋한 추모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왕비 민씨의 모습은 과연 이성적인 것이며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열강을 요리한 여걸'이라느니 '항일 애국열사'니 하는 대접은 그녀에게 당치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친정 식구들의 복록과 권력유지를 위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이다 끝내는 이 땅을 외세의 전쟁터로 만든 일급 망국배였다고 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필자는 근간된 '이완용 평전'을 쓰면서 민비의 행적을 접할 때마다 '아, 이 여인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는 통탄을 수없이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 달성 위해 청-러시아와 손 잡기도"

 

민비 시해는, 그 시행은 일본인이 했지만 '거사'의 주범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다. 민비시해는 한 마디로 1873년 11월 대원군이 민비의 책동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22년간 계속된 며느리와 시아버지간의 추악이 극에 달한 권력쟁탈극의 종결편에 해당한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다 국모가 시해당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영원히 민비시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난군을 피해 충주로 피신했던 민비는 그녀의 조카 민영익과 모의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다. 민비는 서울에 진주한 청나라 군대에 로비해서 구식군대에 업혀 권좌에 복귀해 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게 만든다. 3년 후인 1885년 청나라가 대원군을 풀어주려고 하자 민영익을 급히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보내 대원군을 계속 붙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민비의 간청을 무시하고 대원군을 환국시키자 민비는 눈에 불을 켜고 대원군의 수족들을 찾아내 처단했다. 대원군이 환국한 지 한달 사이에 이렇게 민씨 척족의 손에 잡혀 죽은 대원군의 측근 인물이 30명이 넘는다.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민비는 그녀의 수족인 척족 민영준을 원세개에게 보내 청국 군대로 동학군을 토벌해 달라고 애원한다. 청국 군대가 출동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로 군대를 상륙시켜 마침내 이 땅은 청-일 양국군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모조리 쫓아낸 뒤 단군 이래 최대의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경장을 추진한다. 대원군이 일본에 업혀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제거한 것이다. 이 때부터 민비는 일본에 이를 갈면서 러시아에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은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일 프랑스 등 3국간섭에 굴복해 전쟁배상으로 할양받기로 했던 요동반도를 다시 청국에 돌려주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민비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권력에 복귀시키기 위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붙었다.

3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청국과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면서 장차 조선을 병합하려 한다는 것은 당시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눈치채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 대한 야욕이라는 면에서는 일본보다 러시아가 훨씬 더 노골적이고 거칠었으며 공격적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극동쪽 종점과 연결될 수 있는 부동항을 조선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었다는 것이 애국적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민비가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은 것은 결코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백년대계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고육지책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런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행동 동기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다시 권력에 복귀시키고 저능아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들(뒤의 순종)을 무사히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았다. 그래서 일본이 위세를 부릴 때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민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자 대원군과 일본은 민비 제거라는 공통 목표에 합의하게 된다. 민비시해 사건 당일인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3시, 대원군은 '암여우(민비)를 죽여라'고 외치는 일단의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거처이던 마포 공덕리 별장을 떠나 경복궁으로 향한다. 대원군은 함께 따라나서기를 간청하는 종손자 이준용에게 "너는 여기 남아 있다가 오늘의 거사가 실패하면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한 뒤 가마에 올랐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보다 나흘 전인 8월16일에는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민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민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이성 잃은 시아버지-며느리의 권력투쟁

 

경복궁 담을 넘어들어가 광화문을 열어젖힌 일본 낭인패와 조선군 훈련대 병사들은 곧바로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로 난입해 그녀를 시해했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이었다. 민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이로써 22년간 계속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성 잃은 권력투쟁은 대원군이 일본 낭인패와 훈련대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와 민비를 죽임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민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민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민비 다시 보기'를 제안하면서 거듭 말하지만, 대원군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국모' '여걸' 등의 이미지로 최근 부활하고 있는 민비의 행적을 엄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곧 망국의 책임소재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며, 우리가 '대충 건너뛴' 일제청산 작업을 새로이 다그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스르륵 사이트 가니까 명성황후냐 민비냐 호칭가지고 토론이 활발하네요..

리플중에 좋은 리플이 있어서 올려 드립니다. 민비라는 호칭이 일제가 비하해서 민비라고

부른것이 아니다 라는것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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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에 관해 부언을 드리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민비 혹은 명성황후 등의 호칭은 후대의 역사적 평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민비를 사용하여 왔고, 최근에는 명성황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제에 의한 국권의 늑탈을 강조하는 학계의 경향이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민비(閔妃)라는 호칭이 비칭(비하하여 부르는 이름)은 아닙니다. 평칭일 뿐입니다. 명성황후 당대에 활동한 대학자 김평묵 같은 이는 그의 책 [중암집]에서 ‘민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김평묵은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을 실현시킨 최익현과 같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로,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친일파와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지만 ‘민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윤호진의 뮤지컬 「명성황후」가 유명해진 후로 명성황후라 부르지 않으면 매국노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가 공인한 공식적 최후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옳다는 말도 있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너무나 친숙하게 알고 있는 뒤주대왕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장조(莊祖)’라고 불러야 합니다. 명성황후의 시어머니되는(고종의 법적인 어머니입니다.) 조대비는 대비라는 평칭으로 대신, 신정왕후라거나, 신정황후로 불러야 합니다. 남편 효명세자가 사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고, 따라서 세자빈이었던 그녀는 신정왕후로 추존됩니다. 살아생전에 왕후로서 대비가 되었는데, 승하 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였고, 이때 고종으로부터 6대조까지 모두 황제로 추존하게 되면서, 그녀 역시 최종적으로 ‘황후’가 됩니다.
즉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가 공식칭호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사서에 쓰이는 조대비 혹은 신정왕후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우리는 조선시대 당시의 지식인들 역시 중전, 왕후, 등과 함께 민비라는 이름을 부르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은 아시다시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우리 기록물이고, 이 책을 번역한 분들 또한 조선왕실의 예법을 가장 잘 아는 분들이며, 나아가 조선왕조의 역사를 사랑하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분들이 숙종비 ‘인현왕후’를 ‘민비’라 번역하고 있고, ‘명성황후’ 또한 ‘민비’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왕비들에 대해서도 ‘O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민비’라 부른 것을 가지고 역사를 모른다거나, 친일적 생각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조선 후기 왕실재정과 서울상업’에서 주목을 끄는 건 조선 왕실의 재정이 임시적이고 비공식적인 지출 영역이었으며 왕실 재정의 위기가 곧 조선이라는 국가 재정의 위기와 연계돼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지출과 운영 실무가 내시나 궁녀에 의해 이뤄져 조정 관료들은 빚에 대한 정보조차 접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재정 위기에 대한 왕실의 대처도 미온적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왕실 창고의 재고는 줄어들었지만 왕실은 납품을 담당한 서울 시전 상인들에 대한 대금과 내수사와 궁방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에 대한 급료를 미지급하는 방식으로 왕실의 빚을 이들에게 전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1894~1895년 갑오~을미개혁 시기까지 왕실에 의해 누적된 부채는 일본이 제실(帝室) 재산을 정리하던 1908년까지도 청산되지 못했다.

이 와 관련, 조 교수는 “시전 상인들이 일본에 호소해 왕실에 납품한 채권 원금의 30%를 애휼금으로 보전받았지만 당시 인플레이션이 막대한 상황에서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는 점에 비춰보면 애휼금 자체가 푼돈이나 다름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왕실재정 연구는 10년이 걸렸다. 2006년 시작된 이 연구는 120년간 쌓인 방대한 왕실 회계자료를 엑셀 파일로 DB화했고 대략 50만행이 넘는 데이터와 당시 물가 등을 비교해 분석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재정 파탄에도 제사 등 왕실행사 유지

조 교수는 “근대화 사업을 위해 예산을 많이 쓴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경우에도 실제로 회계 장부를 보면 1895년 을미사변으로 숨진 명성황후에 대한 제사 등 왕실 행사인 의례와 접대, 의식주 소비에 많은 돈을 썼다”면서 “정부 재정이 파탄 난 상황에서 왕실이 지출을 줄여 모범을 보여야 하지만 오히려 빚을 내 기존 소비는 유지했다”고 말했다.

Posted by vrea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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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9p89

2014. 11. 1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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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89

2014. 7. 29.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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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rea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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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살인사건 [至尊派殺人事件]이란.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1993 년 4월 경, 두목 김기환(27)은 강동은(23, 학교 후배),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 (24, 교도소 동기), 백병옥(21)[1995년 11월 2일 사형당할 당시 나이]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의 포커판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조직했다.

 

이 들은 ‘돈 있고 빽 있는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을 만들어서 10억원을 모은다는 목표 아래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93년 7월 살인연습을 위해서 충남 논산의 길에서 23살 가량의 여자(최미자씨)를 무작위로 납치한 뒤에 성폭행하고 살해하여 암매장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에 아지트를 건설했다.

 

겉 으로는 보통 집으로 보이지만 밤에 중장비를 동원해서 몰래 지하실을 만들어서 거기에 창살감옥과 소각장을 설치했다. 94년 9월 8일 새벽 3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까페에서 종업원 생활을 하던 이모씨는 까페 밴드 마스터인 이종현(가명:36세)의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경기도 양평군 와부읍 양수리를 드라이브 하러 갔다. 까페 일을 마치고 경치가 좋은 양수리를 가끔 드라이브 했다고 한다. 이때 갑자기 르망 승용차가 앞을 가로막고 포터 화물차가 뒤를 막았다.

이종현은 차를 급정거 시키고 르망 승용차 운전수에게 항의를 하기 위해 그랜저에서 내렸으나 승용차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뛰어내려 이종현에게 가스총을 쏘고 입과 눈을 테이프로 가렸다.

 

사 내들은 차로 뛰어들어서 이모씨도 테이프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이모씨와 이종현은 지존파의 아지트로 납치되었다. 당시에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수없었다고 한다. 둘은 지하실 철창 안에 감금되었다. 지존파 일당은 이모씨를 쇠파이프로 위협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샅샅이 심문했다. 그리고 차례로 이모씨를 성폭행했다. 일당은 이모씨에게 뺑기통과 야인이라는 책을 던져주고 "우리와 함께 지내면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거야." 라고 했다.

 

다 음날 밤 지존파는 이종현과 이모씨에게 강제로 대량의 소주와 맥주를 먹였다. 그리고 음주운전으로 죽은 것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조사후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모씨는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하여 김현양은 이모씨를 살려주려 했다.

 

하 지만 문상록은 반대를 하여 둘은 멱살을 잡고 싸웠다고 한다. 사내들은 술에 취해 기절한 이종현을 죽이기로 하고 비닐을 쒸우고 목을 졸라 죽였다. 김현양은 이모씨에게 이종현의 목을 조르도록 강요했다.[경찰은 이 당시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고 한다.] 94년 9월 13일 소윤오-박미자 부부가 지존파에게 납치되었다. 소윤오 부부는 협박당해 돈을 빼앗겼다. 9월 15일 이모씨는 협박을 받아 소윤오에게 강제로 공기총을 쏘아 살해했다. 부인 박미자는 칼과 도끼로 살해당했다. 이모씨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김현양은 박미자의 시체에서 인육을 도려내 이모씨에게 먹으라고 지시했으나 이모씨는 거부하였고 인육은 김현양 자신이 먹었다. 지존파는 소씨 부부의 사체를 소각했다. 소각할때는 마당에서 바베큐를 하여 냄새를 지웠다고 한다.

 

9 월 15일 김현양은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다가 실수하여 폭발이 일어났고 머리의 상처를 고치기 위해 영광종합병원으로 치료를 하러 가면서 이모씨와 동행했다. 그리고 치료를 받는 동안 핸드폰과 치료비에 쓰기 위해 가져간 돈 50만원을 이모씨에게 맡겼다. 이모씨는 김현양이 치료를 받는 동안 병원에서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달아났다. 이모씨의 상태를 보고 택시기사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이모씨는 폭력배들에게 쫒기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영광에 있는 폭력배는 자신이 다 안다고 말했다. 이모씨는 택시기사도 지존파와 한패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근처의 포도밭에 내려달라고 했다. 이모씨는 포도밭 주인에게 부탁하여 렌턴카를 타고 대전으로 왔다. 그리고 범인들이 다시 쫒아올지 몰라 택시를 바꿔타고 서울로 왔다.

 

밤12시가 훨씬 지난 시간에 서울에 도착해서 그녀는 우선 여관으로 갔다. 범인들이 집과 직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2시에 친구와 그 남편을 불러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1994년 9월 19일 추석연휴 마지막 날. 지존파 살인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4 년 9월 20일 서초경찰서는 전국을 무대로 납치살해 소각 암매장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인멸해가며 5명(이때 이로부터 8개월 전 조직원 송 모씨를 살해한 것도 밝혀져서 한명 추가)을 살해한 살인 범죄단인 지존파 일당 6명을 검거했다.

 

재 판결과, 정상이 참작된 이경숙을 제외한 살인ㆍ강도ㆍ사체유기죄 등을 적용, 사형을 선고받은 지존파 일당 김기환(27), 강동은(23),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24), 백병옥(21)은 1995년 11월 2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김기환(당시 26세, 강간 치상 1범)

강동은(당시 21세, 특수 절도 등 2범)

김현양(당시 22세, 상해 1범)

문상록(당시 23세, 특수 절도 등 3범)

백병옥(당시 20세, 특수 강도 등 2범)

강문섭(당시 20세, 전과 없음)

이경숙(당시 23세, 여, 절도 1범)

 

 

1993년 4월 도박판에서 서로 만나게 됨.

그 후 '가진 자들을 향한 맹목적인 복수' 라는 지령 하에

김기환을 두목으로 당시 유행했던 홍콩 영화 <지존무상>의 이름을 따

조직 이름을 '지존파'로 결성.

(결정적으로 이들의 범죄를 부추겼던 사건은 당시 있는 자들이 돈을 주고

부정으로 대학을 입학했다 발각되었던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이었음)

 

1993년 5월부터 11월까지

범죄를 위한 도구와 아지트를 마련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둔산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함.

 

1993년 7월 18일 밤 11경,

살인예행연습을 실시한다는 명목 하에

귀가하던 최모양을 납치하여 야산으로 끌고 가 차례로 강간, 살해 후 암매장.

 

1993년 8월

같은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당시 18세)가 공동 예금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들고

달아난 사실을 눈치 채 복수한다는 명목 하에

그를 야산으로 유인,

'배신한 자는 죽인다'는 강령에 따라 칼과 곡괭이로 찍어 잔혹하게 살해 후 암매장.

 

1994년 5월

전남 영광군 불갑면의 두목 김기환의 어머니집을 아지트로 개조.

본격적인 살인공장을 만들다.

(감금시설, 소각로 포함)

 

1994년 6월 17일

두목 김기환, 동네 선배의 조카인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을 강간하여

징역 5년형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두목을 잃은 지존파 일당,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삼고

감방에서 김기환에게 모든 범죄 지시를 받은 뒤

본격적인 범행 활동 개시.

 

1994년 9월 8일 새벽

경춘가도 양수리 부근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이모씨 일행을 트럭으로 납치.

돈이 없음을 확인하고 바로 다음 날 남자는 살해하고

이모씨는 윤간 후 감금, 신고하지 못하도록 남자의 살인에 강제로 가담하게 함.

9월 10일, 남자의 시신과 훔친 차를 절벽으로 밀어뜨려

음주 후 사고로 위장.

 

1994년 9월 13일

성묘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소기업 사장 소씨 부부를 납치,

아내를 인질로 잡아둔 후 소씨에게 현금 1억원을 가져오도록 지시.

거액 강탈 이후 증거인멸을 위해 공기총으로 소씨를 살해하고 부인인 최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

이 과정에서 역시 강제로 인질인 이씨를 가담시키고, 인육을 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함.

 

다이너마이트, 공기총, 군용 대검 등의 무기를 무기밀매상을 통해 구입.

당시 부유층 고객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던

강남의 H 백화점의 주요 고객 명단까지 입수.

9월 17일, 조직원 보충을 위해

강동은의 애인이었던 이경숙을 조직에 가담시킴.

 

1994년 9월 15일

다이너마이트 모의 실험 도중 김현양 부상.

인질인 이모씨와 함께 병원에 동행.

김현양이 치료받는 사이 이모씨, 필사적인 탈출 감행.

 

1994년 9월 16일 새벽 2시

이모씨, 서울 서초경찰서에 지존파 사건을 신고.

 

1994년 9월 19일

마침내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이경숙

지존파 조직원 모두 검거.

 


조직을 결성한 그 해부터 이듬해 9월 15일까지 연쇄 살인을 벌이고 1994년 9월 21일 체포되었을 때까지 반성이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이라며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 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하여 김민경으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하였는데 개인 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주로 백화점에서 벤츠 등을 타고 나오는 복부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범행을 하려고 했으며 피해자들의 현금만 빼앗고(당시에는 카드보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녔다) 협박이나 어떠한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토막 살인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어 처구니 없는 점은 그들이 살해한 사람들이 전혀 그런 것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살해 당한 중소기업 사장 부부는 방탕한 상류층이 아니라 공고를 나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빚 내어 새로 공장 인수한 건실한 사업가였으며 빚을 막고자 어음 돌려막기를 위해서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녔고 고급 차처럼 보이던 차도 회사용으로 개조한 중고차임이 밝혀졌다. 게다가 어려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시기에 납치, 살해당해서 회사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도 있는 상태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살해한 사람은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밤무대 악사였다.



이들은 1심과 3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경숙 제외)

 

그리고 1995년 11월, 김기환을 비롯한 지존파 조직원 여섯명의 사형 집행이 모두 이루어졌다.

 

(재판과정중 강동은은 애인인 이경숙을 극도로 감쌌다고 전해진다)


#1995.11.2 집행 김기환

지존파 일당 6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두목 김기환은 7시 35분에 이끌려왔다. 최후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묻자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회개하기보다는 자기가 했던 말을 합리화하려는 것 같았다. 그 후 냉소하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7시 55분에 집행됐고 8시 8분에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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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손자 낳았다” 조희준 상대 친자확인소 낸 차영 누구?

최종수정 : 2013-08-01 10:52

차영(51) 민주당 전 대변인이 조용기 여의도 순복음교회 목사의 장남인 조희준(47) 전 국민일보 회장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해 주목받고 있다.

차영 전 대변인은 1984년 전남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MBC 아나운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 MBC를 그만둔 후 세종문화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홍보실장 등을 지냈다. 이 시기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미디어컨설턴트, 서울시 시장만들기 운동본부 조순 당시 민주당 시장후보 TV팀 팀장을 맡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지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실 문화관광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홍조근정훈장(3등급)을 받기도 했다.

차영 전 대변인은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해 넥스트미디어홀딩스 대표, KT 마케팅전략담당 상무, 미니게이트 부사장을 맡았다.

2008년 다시 정계로 돌아와 통합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대변인, 민주당 대변인·언론특보 등을 역임했고 지난해 4·11 총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하기도 했다.

1997년 ‘나는 대통령도 바꿀 수 있다’, 2006년 ‘젊은 그녀 전쟁터를 즐겨라’ 등의 책을 냈다.

한편 차영 전 대변인은 2003년 남편과 이혼하고 조희준 전 회장과 동거하며 아들을 낳았지만 조희준 전 회장이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아 전남편과 재결합했다고 주장했다. 차영 전 대변인은 조희준 전 회장을 상대로 친자확인 및 양육비 청구 소송을 내고 결혼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위자료 3억여원과 양육비 등을 청구했다.



주간경향| 기사입력 2008-04-10 14:52

심장 질환으로 죽은 딸을 위해 국회의원 되기로 결심?

“논평은 단호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그러나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했다. 그때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이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의 전신)이 뿌리내리도록 전공 분야인 브랜드 마케팅 쪽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손학규 대표에게 전화했다. 손 대표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가 정계에 입문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딸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지원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3월 15일 딸이 심장 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상중에 친정어머니가 부르시더니 아이가 엄마가 국회의원이 되면 어떤 일을 하느냐, 엄마가 국회의원이 되도록 기도를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민주당 비례대표를 신청했다. 유아교육학과에 다니던 딸은 저소득층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엄마가 국회의원이 돼서 그런 일을 해주길 바랐던 것.




입력: 2013.08.01 10:37 / 수정: 2013.08.01 10:37

차영 '친자 소송' 제기한 조희준은 누구?


[스포츠서울닷컴ㅣe뉴스팀] 차영(51·여) 전 민주통합당 대변인이 조희준(47) 전 국민일보 회장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와 김성혜 한세대 총장의 장남으로 지난 1997년 32세의 나이로 국민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회장이 됐다.

조 희준은 회장으로 활동할 당시 스포츠투데이,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하고 현대방송을 인수하는 등 계열사를 확장하는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하지만 조희준의 경영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1년 6월 국세청 세무조사 때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 검찰에 고발됐고, 같은 해 8월 조세포탈 및 횡령 등 혐의로 구속됐다. 그의 혐의는 지난 2005년 형으로 확정됐다.

특히 조씨는 지난 1월에도 회사 자금을 유용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업체 공금 약 35억 원을 개인 세금을 내는 데 사용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한편 1일 노컷뉴스에 따르면 차영 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조희준의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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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00006719

<앵커 멘트>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하던 30대 남성이 온라인 상에서 논쟁을 벌이던 동갑내기 여성을 살해했습니다.

정치적 이견으로 시작된 논쟁이 감정 싸움으로 번지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장성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10일 밤 부산 반여동, 한 남성이 초등학교 앞을 걸어갑니다.

30살 백 모씨는 이 초등학교와 불과 500미터 떨어진 한 다가구주택에서 동갑내기 여성인 김 모씨를 살해한 뒤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백 씨는 범행 후 부산을 벗어나지 않고 인근 고시원에서 숨어지냈습니다.

<인터뷰> 고시원 관계자 : "(처음 입주한) 뒤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방에 있는지, 뭘 어떻게 하는지 몰랐죠."

그리고 사건 발생 엿새만인 어젯밤, 백 씨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논쟁이었습니다.

백씨는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김 씨와 지난해부터 정치,사회 현안을 두고 매번 극심한 의견충돌을 빚었습니다.

<인터뷰> 백00(광주시/피의자) : "5.18 모욕과 전라도 비하나...배신을 때린다, 홍어다 그런 단어의 사용에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게 됐습니다."

백 씨가 한 '성희롱적 발언'을 문제 삼아 김 씨가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하자 지난해 9월에는 백씨가 공개사과문을 해당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이후에도 욕설과 비방전이 난무했습니다.

<인터뷰> 김종호(해운대경찰서 형사과장) : "그런 것 때문에 분노를 느끼고, 한 3개월 전부터 살해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경찰은 살인 혐의로 백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K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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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포착] 이효리 - 최성욱, 수영장 망중한 "이렇게 놀아요" (포토)


[스포츠서울닷컴 | 이승훈기자] 이효리(30)와 재벌 2세 최성욱(29)이 사랑에 빠졌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이효리 커플의 데이트 장면을 단독 포착했다.

주변의 시선이 거의 없는 호텔 수영장에서 둘의 모습은 여느 커플과 다를 게 없었다. 수영복 맵시를 고쳐주고, 서로 수건을 챙겨주며, 재밌는 얘기에 환하게 웃는 둘의 모습은 평범한 커플의 모습이었다.

이효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쪼개 최성욱을 만났다. 이효리 한 측근은 "성욱씨가 추석 전 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8월 중순 이후에는 이틀에 1번 꼴로 만났다"면서 "효리의 스케줄이 끝나면 성욱씨가 직접 데리러 와 차와 집 안에서 데이트를 즐겼다"고 말했다.


최성욱의 수건을 챙겨주는 이효리


웃는 모습이 비슷한 커플




<사진=김용덕·이승훈·이호준기자>



[단독] 이효리-최성욱 데이트 일지…"짧지만 강렬한 만남"

입력: 2008.09.17 09:30 / 수정: 2008.09.17 11:37


[스포츠서울닷컴ㅣ김지혜·강경윤기자] 톱가수 이효리(30)와 동양고속건설그룹 차남인 최성욱(29)씨가 핑크빛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7월초 지인의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난 두 사람은 8월 중순부터 자연스레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이효리·최성욱의 핑크빛 소식은 연예계 최고 스타와 재벌그룹 2세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효리는 3집 '유고걸'의 음반 활동과 SBS-TV '패밀리가 떴다' 촬영으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시기. 반면 미국 동부의 명문대에 재학중인 최성욱은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귀국해 넉넉한 여가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렇듯 두 사람은 '활동'과 '휴식'이라는 상반된 상황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뜨거운 애정은 한결같았다.

스포츠서울닷컴 취재팀은 두 사람의 핑크빛 데이트 현장을 여러차례 포착했다. 지금 막 교제를 시작한 커플답게 두 사람의 만남은 뜨겁고도 달콤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차와 집 등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고, 지인 커플과 쌍쌍 데이트를 통해 야외에서 공개 데이트를 즐겼다.


취재팀이 데이트를 처음으로 포착한 것은 지난달 29일. 이날 이효리는 3집 후속곡 '헤이 미스터 빅'의 공중파 첫 방송을 마치고 밤 늦도록 압구정과 논현동 일대에서 뒷풀이를 가진 뒤 새벽 3시경 최성욱씨를 만났다. 밤새 이어진 술자리를 파한 뒤 귀가길에 최성욱씨를 부른 것.

이효리는 흰색 벤츠 CL500을 몰고 나타난 최성욱씨를 향해 "달링"이라고 반갑게 외친 뒤 차에 올라탔다. 새벽 늦게 나타나 자신의 집까지 안전히 모셔(?) 준 남자친구에게 손키스를 날리는 등 애교넘치는 모습도 잃지 않았다.


바쁜 일정 속에 시간을 비워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9월 초 4박 5일간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것.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 10일 경에는 최성욱씨와 그의 친구 커플 등을 대동하고 하얏트 호텔 야회 수영장을 찾기도 했다. 당시 이효리의 망중한이 본지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친구 커플보다 1시간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은 텅빈 수영장을 누비며 달콤한 오후를 보냈다. 일광욕을 즐기며 선탠을 했고, 물장구를 치며 수영을 했다. 한가한 호텔 수영장이라 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지인 커플이 합석을 하자 함께 동전찾기 게임 등을 하며 '패밀리가 떴다'의 리얼버전을 연출했다. 이어 두 사람만 조용히 자리를 옮겨 수영장 한켠에 마련된 작은 노천탕에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이효리와 최성욱씨는 노천탕 안에서 어깨를 감싸 안는 등 약간의 스킨쉽을 즐겼다.

이효리의 한 측근에 따르면 이날 수영장 데이트는 최성욱씨의 출국 전 마지막 데이트다. 그는 "이날은 최성욱씨의 출국 파티로 알고 있다"면서 "방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다"고 전했다.



[단독] '동양고속건설그룹' 차남, 최성욱은 누구?…'美 유학생'


톱가수 이효리(30)의 마음을 뺏은 남자친구 최성욱(29)씨는 누구일까. 본지 취재결과 이효리의 데이트 상대로 알려진 그는 자산가치 1조원 대에 달하는 재벌그룹 동양고속건설그룹의 차남으로 밝혀졌다.

최성욱씨는 180cm의 훤칠한 키에 훈훈한 마스크를 가진 한마디로 훈남이었다. 현재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대 유학생이다. 지난 8월 방학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이효리를 만났다. 이효리의 측근은 그를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놀고 게다가 돈까지 많은 '엄친아'로 표현했다.

최씨의 아버지인 최윤신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동양고속건설그룹은 15개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는 중견 재벌그룹이다. 특히 대구-서울 구간을 운행 중인 동양고속산업과 프리미엄 아파트 '동양 파라곤'으로 유명한 동양건설산업, 도요타의 럭셔리카 '렉서스'를 판매하고 있는 D&T모터스 등을 소유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최성욱씨가 형 최성원씨와 함께 동양고속건설그룹을 물려받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씨는 현재 동양고속그룹의 주요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양건설산업의 주식 20,263주(0.81%)를 보유 중이다.

재벌 지배구조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주식 보유량은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동양고속건설그룹이 건설과 자동차라는 두 축으로 구성돼 있어 성원씨와 성욱씨가 나눠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이효리는 3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방송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최씨는 추석 전 미국으로 돌아갔다. 현재 둘은 시차를 극복하며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벌 2세와 톱스타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 재계와 연예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단독] 열애설 부인에도 불구 그들의 만남이 수상한 까닭?



[스포츠서울닷컴ㅣ김지혜·나지연기자] 톱가수 이효리가 1살 연하인 재벌 2세 최성욱씨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스포츠서울닷컴은 지난 8월부터 이효리와 최성욱의 동선을 살펴보며 두 사람이 단순히 친한 누나, 동생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운이 돈다는 것은 크게 3가지 부분에서 느껴졌다. 우선 이효리와 최성욱은 데이트를 즐길 때 마다 남다른 스킨쉽을 나눴다. 지난 10일 하얏트 호텔 수영장을 찾은 두 사람은 노천탕에서는 서로 발을 맞대고 장난을 치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등 다정한 모습을 선보였다.

친구 커플과 쌍쌍으로 데이트를 할 때도 '따로 또 같이'의 모습을 보였다. 일행들과 함께 놀다가도 이동할 때는 둘이만 따로 움직였다. 지난 10일의 경우도 그랬다. 이효리와 최성욱은 호텔 사우나에서 친구들과 함께 씻지 않고 이효리의 집으로 이동해 따로 샤워를 하고 다시 호텔로 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또 다른 이유는 '픽업'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최기사'로 통하는 최성욱은 이효리가 '콜'만 하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달 30일 새벽 이효리의 연락을 받고 논현동 술집 근처로 마중 나간 최성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독] 이효리 측근이 본 최성욱…"부잣집 아들 같지 않아"


[스포츠서울닷컴│송은주·강경윤기자] '만인의 연인' 이효리(30)가 열애 중이다. 이효리의 마음을 빼앗은 상대는 동양고속건설그룹의 차남 최성욱(29)씨다. 최성욱은 현재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 대학에 재학중인 유학생. 미래의 기업인이 되기 위해 경영자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성욱은 성실함과 겸손함을 갖춘 인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유학생활을 모범적이고 착실하게 하고 있으며 학업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 성적도 우수한 편이라는 후문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캠퍼스 생활에 집중하며 모범생으로 지내고 방학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가 대내외적으로 좋은 평판을 듣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탈함 때문이다. 재벌가 자제임에도 부를 드러내거나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만하고 잘난체 하는 재벌 2세의 모습은 전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최성욱씨의 한 측근은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만 재벌가 자제라는 것을 밝힐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고 전했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도 돋보였다. 이효리의 '기사님'을 자처할 정도로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방송과 촬영으로 스케줄이 늦게 끝나는 날은 연인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모습이었다. 최씨의 지인들은 그를 두고 농담삼아 "효리의 기사님"이라 부를 정도였다.

지난달 30일 새벽 백댄서들과 회식을 가진 이효리는 새벽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이날도 어김없이 최성욱씨는 이효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인을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줬다. 남자친구의 남다른 정성에 감동한 이효리는 집으로 들어가기전 손 키스를 날리는 애교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이효리는 최성욱의 따뜻하고 자상한 성격에 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효리의 가까운 지인은 "한살 연하임에도 늘 오빠처럼 다정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이효리가 마음을 뺏긴 것 같다"며 "두 사람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만나며 사랑을 키워가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김용덕·이승훈·이호준기자, 영상=김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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